
박 춘 무 「데무 박춘무」 대표 디자이너 겸 CD
중성적 이미지에 아방가르드한 「데무 박춘무」의 박춘무(58)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대표 디자이너. 세계패션그룹(FGI) 회장으로 지난 연말 제5회 코리안패션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한 그는, 옷처럼 담백하고 선이 굵다. 해외 바이어들에게도 모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핏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 덕에 디자이너 브랜드로 2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며, 세계 30여개국 60개 스토어와 120만 달러(리테일가) 상당의 수출 계약을 이끌어냈다. 「릭 오웬스」, 「지방시」, 「발망」 등 최고 수준의 브랜드가 입점한 이탈리아 최고 편집매장인 ‘루이자 비아 로마’와 ‘안토니올리’ 입점 계약을 맺으며 상품력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로 디자이너 생활 25년째에 접어든 그는, “관습적인 것이 싫고, 언밸런스한 것이 좋다”고 고백한다. 서울 신사동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옷 추구
그에게 꾸준히 ‘중성적 이미지’의 옷을 해온 이유를 물었다.
“옷은 경계가 없어야 해요. 가격과 디자인, 성별 그 모든 것에서요. 그러면서도 멋지고…. 원래 옷은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생긴 거잖아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규범을 제일 싫어해요.”
대통령상 수상을 축하하자 “세계 시장 진출 성과 덕을 본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메인 컬렉션인 「데무 박춘무」와 「데무 박춘무 블루 라벨」로 13일 서울을 떠나 2월까지 독일 베를린의 프리미엄(PREMIUM), 프랑스 파리의 후즈넥스트(WHO’S NEXT), 미국 뉴욕의 코트리(COTRERIE TMRW) 섹션, 파리 트라노이(TRANOI)를 연이어 참가한다. 하반기까지 하면 1년에 8개 해외 전시에 참가한다. 2013 S/S 해외 전시에서만 20%가 넘는 상장률, 11억100여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서울컬렉션까지 합치면 13억 4600만여원.
‘K-패션’이란 말이 없던 15년 전부터 발이 부르트도록 세계 시장을 다닌 그는 “초창기 국내 팬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팬들이 생겨 할만했다”고 말한다. 그 덕에 파리 진출 때는 주최측에서 초청 의사를 밝혀 참가했을 정도로 한국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해외 전시에 참여했다.
미국과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는 물론, 덴마크, 벨기에, 노르웨이 등 북유럽과 중동, 일본, 홍콩, 싱가포르 멋쟁이들이 그의 옷을 즐긴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어울리는 그의 젠더리스 룩(genderless look)을 좋아한다. 그의 스타일이 ‘현대적이면서도 동양적 젠(zen) 스타일’이라며 선호한다.
1년에 1/4은 해외를 돌다 보니 이제는 ‘이 코너, 이 자리에서는 이 콘셉으로 하면 팔리겠다’ 싶은 감이 올 정도다.
*리테일가 기준
◇늘 남다른 것 좋아하고 뒤집어 생각
과연 디자인 영감은 어디서 받을까.
“저는 늘 남과 다르게 뒤집어 생각했어요. 시접이 밖으로 나온다거나, 찢어져 보인다거나, 균형이 파괴됐다거나… 저의 미(美)의 기준이 남다른지, 다른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게 예쁘지 않더라구요. 제가 좋은 옷이 세상 사람들에게 통하니 정말 신이 납니다.”
어린 시절을 물었다.
“제 위로 언니, 오빠, 아래로 여동생 둘이 있어요. 5남매 중 셋째인데 아무도 제게 관심이 없었던것 같아요. 내 밥을 내가 챙기지 않으면 밥 챙겨주는 이가 없었죠. 지금도 습관이 돼서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하고 모든 걸 제가 직접 챙기는 편이죠.”
옷은 얼마나 좋아했을까 궁금했다. “옷은 무지 좋아했죠. 원래 제가 남자 같은 옷을 좋아해서, 친정 엄마도 “그런 거지 같은 옷 그만 입어”라 하셨지만, 저는 그런 옷들이 좋았어요(웃음)”란 답이 돌아왔다.

◇꿈을 접고 상경, 남대문 소매-도매업으로 기본 닦아
알고보니 그의 부모님이 부산에서 아동복과 수영복을 판매했다. 패션의 세계에 노출돼 살았던 셈이다. 아버지는 집도 여러 채 지어 팔았는데, 재수가 없었던지 집에서 개스가 새어나 문제가 생겼다. 결국 많던 재산을 하루 아침에 날리고 집안은 갑작스레 주저앉고 말았다.
그림을 좋아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화가를 꿈꾸었지만 홍익대에 떨어져 재수를 하다 결국 홍익공업전문대학 도안과로 입학해 낮엔 학생으로, 새벽엔 남대문 시장 옷 소매점 사장으로 이중 생활을 했다.
“어릴 적부터 옷 속에서 살아선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옷, 싫어하는 옷을 척 보면 알겠더라구요.”
그 덕에 소매점 7년, 도매점 3년을 거쳐 본인 디자인으로 대박을 냈을 때는 전국 소매점에서 알아주는 감각파로 소문날 정도였고, 덕분에 「데무 박춘무」를 출범시킬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럼 언제 디자이너로 정식 출발한 걸까.
“늘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미련이 남았다”는 그. 명지대 축구부 주장 출신인 남편(데무 박춘무 최병문 사장)을 만나 8년 열애 끝에 결혼, 81년, 82년생 연년생 남매를 낳고, 1987년에야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을 졸업했다. 이듬해 34세의 나이로 「데무 박춘무(DEMOO)」를 론칭했다.


◇「데무」의 탄생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아내의 숍 위 3층에 사무실을 따로 쓰던 남편은 아무래도 아내의 영업력이 신통치 않은 듯해 두팔을 걷어부쳤다.
“가만 놔두면 망하겠다 싶었던가 봐요. 남대문에서 일할 때도 내가 손님 상대는 못해서 옷만 골라 샀었거든요. 남편이 롯데 본점에 전화해서 ‘좋은 디자이너 있으니 와서 보라’고 해서, 롯데 담당자가 와서 본 후에 90년에 입점하게 됐어요. “
어찌 보면 배짱이 통한 셈이고, 홍보가 통한 셈이다.
「데무」란 브랜드 네임은 어찌 지었을까.
“제 이름을 달라니 너무 촌스러워요. 해서 끝글자 무 뒤에 프랑스어로 ‘~에서, ~로부터’의 뜻인 ‘데(DE)’를 달았죠. 물론 200개 이름 중 골라 BI 작업을 했죠.”
그는 1996년부터 파리 프레타 프로테 전시회에 참가했고, 1999년부터는 뉴욕 패션 쿠튀르에도 참가했다. 1999년 뉴욕에 ‘PARKCHOONMOO’ 브랜드로 숍을 오픈했다. 국내에서도 1995년부터 ‘뉴웨이브 인 서울(NWS)’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2000년부터는 매년 서울컬렉션에 참가하며 열정을 내보인다.

◇가족은 든든한 후원자
패션은 아트이기도 하지만 산업이니 경영 감각도 필수다. 그런 점에서 박 디자이너는 다복한 편이다.
먼저 그 스스로 남다른 개성있는 디자인 정신을 가져 상품성이 강한데다 남편과 아들(최윤모 홍보·MD팀장)까지 그의 옷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으니. 남편이 국내 기반을 닦는데 도움을 주었다면, 아들은 해외사업의 총책임자다. 카네기멜론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파슨즈에서 머천다이징을 공부한 인재.
“참 감사하죠. “패션, 진짜 재미있다”는 아들을 보며 힘을 얻어요. 게으름 피웠다가는 금세 혼납니다. 뉴욕 전시를 가도 자기 일로 알고 당당히 주최측과 협상해서 좋은 위치, 공간, 조건으로 전시를 하고, 수출 협상도 하고 고맙지요.”
말이 나온 김에 딸(최기련씨)의 안부도 물었다. 시카고 대학 미대와 여전히 파리 랑방에서 디자이너로 잘 근무하고 있단다.
“아이들이 자기들 얘기하는 것 싫어해요” 라지만 내심 뿌듯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포기 하고 싶던 시절 견디니 승승장구
올해로 25년째.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잘 벌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일일터. 그가 이 경우에 속할 듯 싶다. 하지만 늘 성공만 한 건 아니라고 손사래다.
“「무플러스」를 접던 2002년경이 참 힘들었어요. 지금과 비슷한데도 당시엔 ‘박 선생 요새 무슨 일 있어??’ ‘왜 그리 무겁나?’ 하는 얘기를 들었죠.”
‘이렇게 멈출 순 없다’는 오기로 구조조정을 하고 사무실을 대폭 줄이고, 원단도 남은 옛날 원단을 쓰면서 버텼다. 물론 다시 상황이 좋아졌다. 소위 ‘불티나게’ 팔렸다.
그후 그는 “좋다고 늘 좋은 게 아니고, 나쁘다고 늘 나쁜 게 아닌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국내 기반 안정화 후에 해외 진출해야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이제는 해외 진출을 해야 하는 시대지만, 국내 기반을 안정화한 후에 해외로 나가라”고 권했다.
내수가 안정화 되어야지 평상시 샘플 제작할 기술자들을 가까이 두고 일할 수 있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기술자를 갑자기 구하거나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란다.
국내 백화점에서 그와 함께 입점했던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대다수 축출되었지만, 「데무 박춘무」는 활발하다. 오히려 3년 전 20대를 겨냥한 「디데무(D’DEMOO)」를 론칭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젊은이들의 패션을 리드하고자 한다.
요즘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화가의 꿈을 슬슬 가동하고 있다. 20년 전 그룹전 했던 기분으로 주1회 다시 붓을 들고 있다. 최근엔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그녀의 또다른 변신이 궁금하다.
자료출처 : 패션인사이트(주)